고려전기의 왕

 

 

고려의 목종과 현종

고려의 목종과 현종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희비가 엇갈린 왕입니다

강조의 정변으로 죽임을 당한 목종은 고려의 7대왕이고요

 강조의 정변으로 왕위에 오른 현종은 고려의 8대왕입니다.

강조는 정변을 일으킨 후 목종을 시해하고 대량원군인 현종을 왕위에 앉히게 됩니다.

----------------------------------------------------------------------------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왕위에 오른 현종

----------------------------------------------------------------------------------------

경종의 맏아들인 목종

고려의 7대왕인 목종의 정식 이름은 목종선양대왕입니다.

목종선양대왕은 경종의 맏아들 인데요 목종의 어머니는 헌애태후 황보씨이다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태후 황보씨는 보통 천추태후로 불리고 있습니다.

고려사에는 경종의 맏아들인 목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목종선양대왕(穆宗宣讓大王)은 이름이 왕송(王誦)이고 자가 효신(孝伸)이며, 경종의 맏아들로 모친은 헌애태후(獻哀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경종 5년 경진년(980) 5월 임술일에 탄생했으며 성종이 즉위하자 그를 궁중에서 길렀다.

성종 9(990) 6월에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되었으며 성종 1610월 무오일에 성종의 유언에 따라 즉위했다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죽은 목종

목종은 강조의 정변을 계기로 죽게 되는데요 목종이 강조에게 도음을 청하자 강조는 도리어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군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강조는 김치양 일당을 살해하였고요 목종은 쫓겨나 충주로 가는 도중 살해되었습니다.

목종의 죽음은 나름대로 의혹이 많은데요 현종의 즉위를 합리화 시키기 위하여 강조가 목종을 죽인 것으로 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목종의 죽음과 강조의 정변

강조는 정변을 일으켜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를 숙청하고 목종을 시해 하였습니다.

강조가 오랫동안 고려 조정을 어지럽혔던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를 숙청한 일에 대해서는 백성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를 믿고 불러들인 죄 없는 목종을 시해한 일과 또 스스로 정권을 잡은 일에 대해서는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는 사건은 거란의 고려침입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거란을 강조의 정변을 구시로 2차 침입을 하게 됩 니다.

거란의 2차 침입때에는 거란의  성종(聖宗)이 직접 군대를 몰고 고려를 침입하게 됩니다.

 

강조에 의하여 추대된 현종

목종은 강조의 정변이 일어난 후 강조에 의해 폐위되어 충청도의 충주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습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는데요 대량원군이 바로 즉 제8대 왕 현종입니다.

고려의 제8대 왕인 현종은 거란의 2차 침입당시 참패하였으나 끝내 거란에 친조를 하지 않습니다.

거란의 장군 소배압이 3차 침입을 할 당시에는 강감찬장군이 이를 섬멸하여 물리쳤습니다.

3차 침입 이후에는 형종은 거란과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현종은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였는데요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수호하기 위하여 대장경의 제작에도 착수 하였습니다.

고려 현종 당시에 만든 대장경을 초조대장경이라고 하는데요 대구 부인사에 보관이 되어 있다가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게 됩니다.

고려사에는 현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은 이름이 왕순(王詢)이며, 자가 안세(安世)이다. 안종(安宗)의 아들로, 그 모친은 효숙왕후(孝肅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성종 11(992) 임진년 7월 임진일에 났으며, 조금 나이가 들자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책봉되었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천추태후(千秋太后)가 그를 꺼려한 나머지 강제로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게 했다. 처음 숭교사(崇敎寺)에 있을 때 어떤 승려가, 큰 별이 사원의 뜰에 떨어지더니 용으로 변했다가 다시 사람으로 변하는 꿈을 꾸었는데 이 사람이 곧 왕이었다. 이 일 때문에 여러 사람이 그를 특출하게 여기게 되었다. 목종 9(1006)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1)로 옮겨 살게 되자 천추태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해치려고 했다. 마침 사원에 있던 늙은 승려가 방 밑에 구멍을 파서 숨기고 그 위에 침상을 놓아두어 그를 지켜 주었다

 

현종에 이어 즉위한 덕종

현종에 이어 즉위한 덕종은 현종 7년에 태어난 후 현종 11년에 연경군(延慶君)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이후 현종 13년에 태자가 되었고요 태자가 된 이듬해에는 거란으로부터 고려국공(高麗國公)으로 책봉되었습니다

현종의 맏아들인 덕종은 효성이 매우 지극하였는데요 아버지 현종이 죽자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한 후에는 정전옆에 있는 익실에서 조석으로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덕종

현종에 이어 즉위

현종 7년에 출생

현종 11년에 연경군(延慶君)으로 책봉

현종 13년에 태자

현종 13년에 거란으로부터 고려국공(高麗國公)으로 책봉

 

천리장성을 쌓은 덕종

현종은 즉위전반부에는 거란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지만 즉위후반기에는 거란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게 됩니다.

당시 덕종이 거란으로부터 고려국공(高麗國公)으로 책봉되었다는 사실은 고려와 거란간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덕종이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성입니다.

덕종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압록강 하류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은 왕이기도 합니다.

  

고려사

고려사에는 덕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덕종경강대왕(德宗敬康大王)은 이름이 왕흠(王欽)이고 자가 원량(元良)이며, 현종의 장자로 모친은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현종 7년 병진년(1016) 5월 을사일에 태어나 같은 왕 11년에 연경군(延慶君)으로 책봉되었고 13년에 태자가 되었다.

그 이듬해 거란으로부터 고려국공(高麗國公)으로 책봉되었다.

225월 신미일에 현종이 죽자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한 후 익실(翼室 : 정전 옆 채)에서 조석으로 슬피 울었다. 갑술일에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장례 절차[成服1)]를 시작했다.

 

덕종 즉위년에 있었던 일

덕종은 즉위하자마자 서눌을 검교태사(檢校太師)로 임명하고 강감찬을 검교태사·시중(侍中)으로 임명했했습니다

서눌을 검교태사(檢校太師)로 임명했던 일을 비롯하여 덕종 즉위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고려사에서는 다음가 같이 기록을 하였습니다.

기묘일. 강감찬(姜邯贊)을 검교태사·시중(侍中)으로 임명했다.

을유일. 서여진의 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 아지대(阿志大) 27명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을미일. 동여진의 장군 대완사(大宛沙)와 이라(伊羅) 58명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철리국(鐵利國) 임금 무나사(武那沙)가 약오자(若吾者) 등을 보내 담비 가죽을 바쳤다.

송나라의 태주(台州 : 지금의 중국 저장성 린하이현) 상인 진유지(陳惟志) 64명이 왔다.

병신일. 현종을 선릉(宣陵)1)에 장사지냈다.

무술일. 왕이 현종의 장례 절차를 마쳤다.

경자일. 왕이 경령전(景靈殿)2)을 참배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선왕들에게 고했다.

계묘일. 왕이 신봉루(神鳳樓)3)로 가 구정(毬庭)에 금계기(金鷄旗)4)를 걸고 사면령을 내렸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갯벌

생명공학과 나노산업

회귀선 부근에 많이 형성되는 사막